
스탠포드 대학교
호스텔에서 4인실 믹스룸에 묵었는데 내 아랫침대가 '가쿠'라는 일본인 남자애였다. 대학교 1학년인데 자긴 1학년이니까 10일간 수업을 째고 미국 서부여행을 하는 중이랬다. 1학년들 원래 공부 별로 안 하잖아~ 하길래 얼결에 동의해놓고 보니, 한국 대학도 그렇던가? 요즘은 학부제 입학이라서 1학년 때가 제일 피말린다. 전공예약이나 학과로 입학한 아이들이야 마음 편하게 1학년 때 놀지만, 학부로 입학한 대부분의 아이들은 2학년 때 원하는 과로 전공진입을 하기 위해 새내기 1년 간 피터지게 공부하고 학점 스트레스도 장난이 아니다. 나도 1학년 때가 제일 공부하기 힘들었었다. 1학년 마치고 겨울방학 때 유럽을 여행했었는데 가끔씩 다가올 전공진입 결과 발표를 생각하면 놀다가도 흥이 싹 가시곤 했다.
암튼 얘는 1학년 때 논다니까 그렇다 치고....
캐나다에서 교환학생으로 만난 대부분의 일본인 학생들은 영어를 굉장히 잘 하는 편이어서, '일본인은 영어를 못한다'라는 편견이 사라진 지 오래였건만, 미국에 와 보니 허허허.... 미국에 있는 여행객들 대부분이 미국사람 혹은 유럽사람들인데다가, 한국에선 배낭여행으로 유럽이 인기여선지 아시아인 여행객이라곤 거의 일본사람들밖에 만나질 못했는데, 그래서 일본애들이 영어 못하는 게 더 튀어보였다. 유럽사람들은 대부분 영어를 상당히 잘 한다. 한국인이나 중국인들이 좀 있었으면 피차일반이니까 괜찮았을텐데 일본애들만 있으니까 되게 못해보인다...... 그 마음 이해한다. 일본어가 한국어랑 문장구조가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한국인들이 영어를 배우면서 겪는 어려움을 걔네도 그대로 느끼고 있을 텐데, 음성학적 한계까지 겹치니 이건 뭐 ㅜ_ㅜ 나도 영어공부하느라 힘들었다.... 지금도 힘들다..... 아놔...... '가쿠' 힘내!
그러나 말을 못해도 대화는 가능한 법! 호스텔 들어온 첫날 밤에 가쿠랑 대화다가, 가쿠가 그 다음날 밤에 LA로 떠나는데 시내 구경을 다 해서 하루종일 할 일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럼 나 내일 스탠포드 구경가려고 했는데 너도 갈래?"
"오......스탠호-도? ...............스탠호-도까..."
하고 잠시 고민하던 가쿠, 같이 가기로 결정하였다. 스탠포드가 쫌 유명한 학교도 아니고 같은 대학생으로서 구미가 당기게 마련이지.
날씨는 쾌청하고~ 샌프란시스코 Cal Train역으로 고고!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에서 좀 더 남쪽에 위치한 Cal train역에서 기차를 타면 50분 정도 걸려서 Palo Alto라는 역에 도착한다. 거기서 무료 셔틀 버스를 타면 스탠포드 대학교 안까지 들어갈 수 있다.
기차여행도 이 얼마만인가~ 함께하는 가쿠와 대화도 좀 나눠보고 싶었지만 우리 사이엔 너무 높은 언어의 장벽이.... 한참을 아무말 없이 기차를 타고 가다가 가쿠가 갑자기 부스럭거리더니 뭔가를 내밀었다. 보니까 여자친구랑 찍은 스티커 사진이었다. 아, 예쁘다고 귀엽다고 칭찬해줬더니 신이나서 이름이 '마호'라며 이쁘고 똑똑하다고 그렇게 자랑이다. 짜식- 귀여운 것. 좋으냐?
가만히 듣고서는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나도 자랑을 해 주는 것이 인지상정(-_-)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럼 너도 내 남자친구 사진 볼래? 캐나다 오기 전에 광릉수목원에 놀러갔다가 찍은, 한라봉이 바보같이 나왔다고 진짜 싫어하는, 그치만 난 귀엽게 나왔다고 생각하는 사진 한장이 디카에 남아있었다. 보여줬더니 반응은 "Oh~!" 끝!!!!!
그치만 '잘생겼다, 착해보인다, 넌 땡잡았다' 뭐 대략 이런 표정이었다구. 영어가 짧아서 뭐라고 표현을 못 한 것 뿐이라고 난 믿어.............
Palo Alto역에서 셔틀을 타고 학교로 들어가는데 크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마을 하나가 학교라고 보면 된다. 우리학교도 한국에선 제법 캠퍼스가 큰 학교인데 스탠포드 단과대 하나 넓이 쯤 되는 것 같다. 궁금해서 위키피디아에서 면적을 찾아봤더니!!
Stanford University owns 8,183 acres (33.1 km2) which makes it the largest university campus in the world, in terms of contiguous area.
더 넓은 땅을 가진 대학들도 있지만, 단일 캠퍼스 부지로는 스탠포드가 세계에서 제일 크다는 이야기. 뭐 저 땅에 전부 학교 건물만 심어놓은 건 아니고 숲도 있고 호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어마어마하구나. 와웅.

Hoover Tower
관광객들을 위한 전망대로 사용되는 듯한 후버 타워에 2달러 내고 올라갔다.

광활한 대학 캠퍼스, 이건 극히 일부부분에 불과함 =_=
스탠포드 아저씨는 돈이 엄청 많았나보구나.....

학교 도처에 있는 bicycle racks
학교가 워낙 넓다보니 쉬는 시간에 건물간 이동을 할 때 학생들이 다들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수업 끝나는 종이 울리면 자전거 탄 애들이 쏟아져 나오는 데 그 때 만큼은 캠퍼스가 매우 분주하다. 후버 타워 위에서 안내하는 직원에게 여기 애들은 전부 자전거 타고 다니냐고 물었더니, 등록된 학생 수가 14000명인데 등록된 자전거 수가 12000대라고. 그치만 자전거도 캠퍼스가 평지에 지어졌으니까 하는 말이지, 길도 얼마나 걷기 좋게 포장이 잘 되어있는데. 우리학교라면 비탈길에서 자전거 끌고 올라가다가 수업에 지각할 거다.
날씨도 정말 좋다. 캘리포니아는 괜히 과일이 많이 나는 게 아니었다. 날씨가 이렇게 좋은 걸!
스탠포드는 많이들 상상하는 미국 대학 캠퍼스의 모습과는 조금 다른 것이, 건물들이 스페인풍으로 지어진 데다 야자수가 곳곳에 늘어서 있어 마치 지중해에 온 듯한 느낌이다. 물론 날씨도 지중해성 날씨. 캘리포니아의 맑은 날은 한국 맑은 날의 뺨을 수십대는 치고도 남을 정도로 햇빛이 강렬하다. 한국에서 한달에 한번쯤 있을까 말까 한 그런 '미치도록 좋은 날씨'가 여긴 일상이다. 그리고 전혀 습하지 않아서 그늘에만 들어가면 서늘하다 못해 추울 지경이다. 미국... 이런 축복받은 나라같으니라구.
난 햇빛 알레르기 때문에 맑은 날에는 외출을 자제해야 하는 사람이니 캘리포니아는 이민오면 딱 죽기 좋은 동네였다. 그치만 나도 사람인지라 해가 쨍한 걸 보니 기분이 이렇게 좋은데 다른 한국사람들이 와서 이런 날씨를 보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이런 예쁜 건물에서, 이런 뜨거운 태양 아래, 과연 다들 공부를 하기는 할까? 하니까 유명하겠지 -_-
아, 이런데서 공부할 수 있다면 나도 대학원을 한번 가볼까....(스탠포드가 받아주건 말건 상상은 내 자유)하는 생각이 잠시 고개를 들 정도였다. 캐나다 오기 전에 여름 계절을 들을 때, 같은 수업을 청강하는 스탠포드 박사과정 선배가 있었다. 방학 동안 한국 들어온 김에 관심있는 학부 수업에 청강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때는 '우와- 스탠포드' 하고 말았는데 와서 직접 보니 학문적 수준 따위야 가늠할 수 없지만 학교가 일단 크기와 아름다움으로 사람을 압도했다. 가쿠도 입이 헤벌레-해서 돌아다녔다. 오만가지 설정사진은 다 찍고 말이다. 애기다 애기. 열여덟살이래.

Stanford Bookstore
내가 스탠포드에 온 가장 중요한 목적!
미국에서 두번째로 큰 대학 서점이라는데 책보다는 기념품이 더 많아보이더라. 기념품 장사로도 학교가 돈을 꽤 벌듯. 나도 역시 책이 아니라 옷을 사러 온 사람이었다. 누가 자긴 어렸을 때부터 스탠포드 후드티가 그렇게 멋있어보였다고 하나 사다달라길래 쯧쯧 하면서도 내꺼랑 같이 두개 샀다 =_=

기숙사 건물
옷도 샀다, 밥도 먹었다, 이제 나가려고 하는데 떠나는 날 다시 한 번 놀라게 한 건물이 이 기숙사 건물이었다. 창문 짱 커! 방 하나당 저런 통유리 창문이 하나씩 붙어있었다. 커튼도 대부분 쳐놓지 않고 있어서 애들이 안에서 공부하는 거, 컴퓨터 하는 거 다 보였다. 흑흑 ㅠ_ㅠ 우리학교의 감옥 같은 건물에 비하면 정말 운치있고 멋있는 기숙사야. 사진보다 훨씬 멋지다. 아 이러면 기숙사 생활도 할만 하지.
그런데 북미 대학은 1인 1실 기숙사가 보편적인가? 사실 우리나라 대학도 1인 1실 기숙사를 제공하는 게 학생 복지와 학업 증진을 위해서 옳다고 보는데. 1학년 때 한참 나는 열심히 공부하고(?) 자는데 우리 엑스동거녀가 술 마시고 놀다가 새벽 세시에 들어오곤 했었지. 종종 아멜리아랑 오드리도 데리고 와서 재우고 말이야. 우리 엑스동거녀의 개념없는 귀여움을 난 사랑하니까 뭐. 난 좋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어서 운이 좋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2인 1실 기숙사라는게 생각보다 효율적이지 못하다. 애들이야 싸고 학교가 가까우니까 사는 거지.
그래서 진정 학생을 위한다면 1인1실 기숙사를 '충분히' 지어서 제공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우리나라 대학들 기숙사 정말 열악한데 애들은 그거 못 들어가서 안달인 게 이건 정말 아니야. (물론 스탠포드 기숙사비 장난 아니겠지. 지금 캐나다 내 방도 1학년 때 한국에서 내던 기숙사비 네 배다;)
다시 기차 타고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와, 야경을 감상하기 위해 트레져 아일랜드로 갔다. 트레져 아일랜드는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를 잇는 베이브릿지 한 가운데에 위치한 섬인데 여기서 보는 샌프란시스코 야경이 또 제맛이라는 소문을 듣고 그렇다면 놓칠 수 없지! 시내에서도 멀고 뷰포인트로 아주 유명한 곳은 아닌지 관광객이 거의 없었다. 가쿠랑 나는 "샌프란시스코는 너무 예뻐!"를 외치며 신나게 셔터 눌러댔다.

베이브릿지와 샌프란시스코

버섯과 양파를 얹었더니 이건 가격이 꽤 나왔지.. 그래도 18불 정도
스탠포드랑 야경이랑 둘다 너무너무 좋았다는 가쿠를 끌고 어제 밥 먹은 그 레스토랑으로 가서 걔는 그 반마리 닭 시켜주고, 나는 스테이크 도전. 가쿠가 은근히 뺏어먹고 싶어하는 눈치였는데 내가 너무 배가 고파서 다 먹어버렸다. 크크크.
내 덕에 너무너무 즐겁게 여행했다는 가쿠는, 호스텔로 돌아와서 한국어로 내 이름을 적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붓펜을 꺼내 노트에 뭘 끄적끄적 하더니 찢어서 건네주는데.
本当にありがとう。
とてもNICE DAYでした。
一生忘れません。해석:
정말로 감사합니다.
매우 즐거운 날이었습니다.
평생 잊지않겠습니다.
까진 좋았다. 그런데 그 아래 'OOO씨에게' 라고 적어 놓은 걸 보니, 으음. 내 이름에 있는 ㅇ을 전부 ㅁ으로 적어놓아서, 내 이름 완전 웃기게 됐어......... ㅜ_ㅜ 이건 뭐라고 말도 못하겠고....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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