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햇빛이 너무 강해서 얼굴이 다 날아갔다
Sep. 14. 2008
on the suspension bridge, lynn valley.
밴쿠버 다운타운에서 Seabus라고 불리는 페리를 타면 부촌으로 유명한 노스 밴쿠버에 데려다 준다. 거기서 조금 더 들어가면 서스펜션 브릿지(계곡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있는 다리 말이다)가 있는 Lynn Valley다.
사실 밴쿠버에서 유명한 서스펜션 브릿지는 카필라노 계곡에 있는 다리인데, 그건 정말 길고 무서운 모양이다. 린 밸리에 있는 다리는 짧고, 별로 무섭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아래를 한참 내려다보고 있으면 약간 아찔해진다) 무엇보다 무료라서 좋다. 카필라노 다리는 꽤 비싸다고 들었거든.
학교는 다운타운에서도 한시간 거리에 위치해 있어서 린 밸리까지 가기 위해 무려 아침 아홉시에 출발했다. 여기와서는 아홉시 수업도 없을 뿐더러 통학할 필요도 없어서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수면 사이클이 형성된터라 아침 아홉시면 내겐 새벽같은 시간이다.
오늘도 햇살은 끝장나게 좋았다.
학교에서 출발할 때는 클레어언니, 제이미, 에밀리, 나(이상 한국 여자애들)와, 에밀리의 하우스메이트, 영국남자 그랜트까지 다섯명이었다. 그랜트는 신기하게도 이리저리 만날 일이 많다. 물론 내가 에밀리랑 친해서 하도 거기 기숙사를 드나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Seabus를 탈 수 있는 다운타운 워터프론트 역에 도착했을 때, 클레어언니와 아는 사이라는 네명의 남자애들이 더 합류했다. 일본에서 온 다카오, 독일 남자 마르쿠스와 폴, 그리고 프렌치 가이 아몽.(이름 짱 귀엽지 않은가)
캐나다에 와서 생각보다 키 큰 남자애들이 적고, 뚱뚱한 사람이 상상했던 것보다는 적어서 놀랐는데 오늘은 참으로 유럽 애들 같은 애들을 만났다. 그랜트는 키가 6피트(180cm)라고 했는데 귀찮아서 뒤에 몇인치를 잘라먹었는지 그것보다는 훨씬 커 보였고, 아몽은 187cm(프랑스는 미터법을 쓴다)라고 했다. 압권은 마르쿠스였다. 187cm라는 아몽보다 몇센티는 더 컸다. 아, 이런 게 유럽 남자들이구나. 참으로 흐뭇했다.
우리 영국신사 그랜트는 어지간해서는 다른 음식을 안 먹고 그 빌트업 쉐이크만 먹고 산다더니 피부도 너무 허옇고, 애가 비쩍 말라서 안쓰러워보인다. 매번 내용물이 조금씩 바뀐다고는 하지만 우유, 바나나, 비스킷, 피넛버터 따위를 넣어 먹는 빌트업 쉐이크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나 : 야, 그것만 먹고 살 수 있다고? 안 죽어?
에밀리 : 살아있잖아 -_- 저기 살아 있네
우리 에밀리가 또 좀 시크하다.
아몽은 우리와 같은 학교에서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학생이고, 폴과 마르쿠스는 캐나다 여행을 하는 중인데 일부러 워킹비자를 받아와서 여행 중간중간 일을 하며 자금을 조달하는 멋있는 녀석들이었다. 마르쿠스는 덕분에 접시 닦기의 달인이 되었다나 뭐래나. 공사장에서 일하다 피곤해서 그 자리에서 잔 적도 있다고 했다.
그나저나 Paul을 독일어로는 파울이라고 읽냐고 궁금해서 물어보려다가, 마르쿠스도 걔를 자꾸 폴이라고 부르길래 관뒀다. 독일어로는 Laura도 라우라고, Paula도 파울라거등.
서스펜션 브릿지는 생각보나 너무 짧아서 좀 시시했고, Twin Falls라는 사인을 보고 따라왔지만 쌍둥이 폭포는 어디에도 없었다. -_- 약간 실망한 후에 계곡으로 내려가 물 고인 웅덩이에서 잠시 물놀이를 했다. 난 나중에 발 말리기도 귀찮은데다가, 햇살이 너무 강해서 물에 안 들어가고 그늘에서 쉬고 있었다. 마르쿠스가 왜 안 들어오냐고 자꾸 채근하는게 어째 나를 시시하고 재미없는 동양 여자애로 볼 지도 모르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난....햇빛 알레르기야!"
"뭐어어어어어?"
나의 증상과 그게 얼마나 귀찮은 알레르기인지를 설명하고서 그늘에서 편히 쉴 수 있었다. 개들도 뛰어다니고, 훈훈한 멕시칸 꼬맹이까지 첨벙거리고 돌아다녀서 참으로 행복했다.

찍어놓고 보니 사진이 오묘한데

누나를 위해서 바위 위에서 포즈도 한번, 아 훈훈하다♡
아빠와 놀러온 꼬맹이는 스페인어를 쓰고 있었는데 너무너무 귀여워서
"꼬마야, 누나가 사진 한장 찍어도 될까?"
하고 영어로 물었더니 아빠가 옆에서 "Sure!"이라고 대답했다.
클레어언니와 나는 저 꼬맹의의 다리 길이를 보면서 다시 한번 인종적 한계를 느꼈다.
그늘에서 한참 쉬고 있으니 햇살이 잘 드는 곳에서 놀던 아몽과 그랜트가 내 쪽으로 왔다.
"널 위해서 우리가 그늘로 왔어."
아, 이런 것이 프렌치 가이의 매너?
아몽과 대화하는데 자꾸 저 훈훈한 멕시칸 꼬맹이가 눈 앞에서 알짱거려서 "Hey, boy~"하고 불렀더니 아몽이 쟨 영어 못한다고 나를 말렸다.
"아냐, 쟤 영어 할 줄 아는데? 쟤네 아빠가 아까 쟤한테 영어로 말하는 거 봤어."
"정말? 쟤네 스페인어 하던데?"
"아니 가끔 영어 쓰더라구. 꼬맹아, 너 영어 할 줄 알아?"
알짱거리던 꼬맹이가 "Yes~!" 한마디를 던지고 저 쪽으로 가버렸다.
그랜트는 영국인답게 탐구 정신이 강해서, 내 알레르기에 관해서 무척 궁금한 게 많았다.
"잠깐 햇볕 쬐는 건 괜찮은 거야? 오, 그럼 10분은 햇볓에, 10분은 그늘에 이런식으로 번갈아가면서 하면 괜찮다구? 그 증상은 얼마나 오래 가는데? 무엇이 널 그렇게 만들었니? (이 질문 좀 황당했다... 아몽과 내가 the sun!하고 대답했더니) 아니 그게 아니라, 유전이야?"
뭐... 다 대답해줬다.
아몽이 "너 그럼 햇빛 너무 강한 날에는 우산 쓰고 다녀?" 라고 묻길래
"아니 내가 한국에서는 그걸 쓰고 다니는데, 여기서 아무도 안 쓰고 다니니까 쪽팔려서 못 쓰겠어." 라고 대답하는 순간, 어느새 우리 앞에 있는 바위에 올라가 몸을 말리고 있던 훈훈한 멕시칸 꼬맹이가 대화에 껴들었다.
"사람들은 너무 맑은 날에는 우산을 가지고 다녀요!" (People carry umbrellas when it is so sunny!)
오오- 그 귀여운 얼굴로 누나의 건강을 위해 이런 얘기를 해주다니!
"응응응! 누나도 알아, 누나도 그렇게 해~!!!!!!!!!!!!!!!!"
물 웅덩이를 떠나서 웅장한 호수에 대한 기대를 갖고 Rice Lake라는 곳을 향해 가다가, 우리가 강의 일부라고 생각했던 가까 그 물 웅덩이가 Rice Lake 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길을 잘못 든 우리는 산을 아주, 제대로 탔다 =_= 나야 스니커즈를 신고가서 괜찮았는데, 힐 신고 온 제이미가 정말 안습. 그래도 가파른 길에서 아몽이 손도 잡아주고 좋아보이더라. 난 양심상 아몽의 손을 거절했다.
겨우겨우 린밸리를 빠져나와서, 노스 밴쿠버의 Seabus 항구에 도착했을 때가 네시였다. 아침에 씨리얼 한 그릇 먹고 나가서 산을 탔더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항구에 피자 한조각을 1.5불에 파는 정말 싼 피자집이 있었다. 한조각만 먹을 생각이었는데 너무 맛있어서 아사 상태에 있던 에밀리와 나는 결국 두 조각을 먹었다. 하와이언, 페퍼로니 둘 다 진짜 맛있더라. 콜라까지 3.5불에 그렇게 잘 먹고 났더니 너무 흐뭇했다.
나와 에밀리가 두조각째의 피자를 먹고 있는 동안 아이들은 항구 저편으로 가서 경치를 감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랜트가 나타나서 우리에게 칭얼대기 시작했다. 쪼금 과장해서 한국어로 옮겨보자면....
"아, 나 진짜 쟤네 왜 저러는지 모르겠어. 왜 씨버스 안 타? 우리 이거 놓치면 또 30분 기다려야 한단 말이야."
항구에 막 도착했을 때 씨버스를 놓쳐버려서 다음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마침 피자를 두조각이나 먹고 배가 부른 에밀리와 나는, 추석인 오늘 저녁 한국 아이들끼리 시내 한국 음식점에 가서 밥이나 먹기로 한 약속조차 귀찮아서 그냥 기숙사로 돌아갈까 생각 중이었다. 집에 가고 싶어 안달난 그랜트를 우리가 구제해주기로 했다.
"아 그래? 우리도 집에 갈 건데. 너 그럼 우리랑 같이 가자."
"정말? 나 쟤네한테 가서 물어보고 올게."
그랜트가 애들한테 먼저 가겠다고 말하러 간 후, 에밀리랑 나는 그랜트를 흉내내며 놀았다. (그랜트 미안)
"아잉~ 왜 집에 안가 잉잉"
"나 집에 가고 싶단 말이야, 쟤네 왜 저래, 잉잉"
우리랑 동갑인데... 암튼 하는 짓이 딱 애다. 이런 앤 줄 몰랐는데-_-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에 간단히 장을 보고서, 한라봉과 통화하며 늘어져 있다가 오늘 기숙사 잔디밭에서 노래자랑이 있다기에 구경을 나갔다. 추우니까 배쓰타월을 뒤집어쓰고 에밀리와 줄리언니랑 노래자랑을 구경하는데, 얘네의 놀이문화는 너무 건전해서 한국인의 정서에 맞지 않는다. 다들 기타 들고 나와서 얌전한 노래만 부르더군.
방에 돌아와서 오늘 장을 본 재료로 간식을 해먹었다.
내가 이름도 붙였다. <하와이언 베이글>
레시피
- 베이글을 반으로 자른다.
- 단면에 버터를 바른다.
- 파인애플 슬라이스 한 조각을 올린다.
- 모짜렐라 치즈를 썰어서 얹는다.
- 미니 오븐에 5분만 구울 것!
내일 아침도 이걸로 먹을려고.
야, 진짜 맛있어, 감동해!
대충 만든데다 사진도 대충 찍어서 별로처럼 보이지? 진짜 맛있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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